박상희 조각가 [사진=더코리아저널]


[박상희 메타포] 질문과 형태가 보이는 틈 사이에

조각가 박상희

부처가 되기 전,

인간의 생로병사에 초월할 순 없을까?

의문과 질문에

사유하는 모습의 태자 싯다르타.

그 반가사유상을 연상케 하는 형상에 목걸이를 걸고 거기에 십자가를 새기고 있다.

왜?

그래야만 할까?

왜?

그래야만 했을까?

사실

나의 질문은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어머니와 30여 년 전의 인도 갠지스 강가의 죽은 자를 태우는 하얀 연기,

언뜻 신의 모습처럼 보였던 히말라야.

그리고

이집트 신전과 나일강 새벽의 푸른 풍경, 그리스의 올림포스와 노아의 방주가 안착했다는 아르메니아의 아라라트산을 보며 이어졌다.

나의 작업은

이 질문에서 시작되었고 질문은 형상을 낳고 형상에 나의 질문을 심었다.

아마도 훨씬 그전에 이미 싹텄을 것이다.

형제가 위아래로 여럿 있었음에도 나는 국민학교 입학 전에 수년간을 외할머니와 외톨이로 자랐다.

그러기에

나 스스로 인식 못했을 뿐.

신과 인간의 실존적 관계.

운명의 씨줄과 날줄은?

그리고 모순 속에 모순.

그 질문 속에 나무는 예수가 되고 석가가 되었다.

십자가가 열렸고 열매로 부처의 얼굴과 손을 깎았다.

나무를 깎고 돌을 쪼면서 행복했고 정말 아팠다.

때로는 그만큼의 위로도 받았다.

불행히도 佛記 2569년과

AD 2025년, 아브라함이라는 같은 조상을 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 죽이는 전쟁 등을 보며 사랑과 자비를 최고의 덕목으로 보는 모순의 시대에 이 질문은 내게 아직도 유효하다.

이 질문은 언제 끝날 것인가?

2025년 11.30

겨울이 들어 선 안개 짙은 강화도에서

[사진=박상희]
[사진=박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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