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표 인문 운동가 [사진=더코리아저널]


[박한표 인문일지] 3518.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11월 24일)

어제는 지난 <인문 일지>를 e-book으로 엮어 볼까 하면서, 하루 종일 다시 읽고 수정했다. 그러던 중 좋은 깨달음이 있었던 부분이 있어 오늘 아침 다시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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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하면 소중하게 챙겨야 할 것이 다음 네 가지라고 나는 늘 기억하고 있다.

① 나만의 굴뚝을 만든다.

나의 경우는 혼자 커다란 스크린의 컴퓨터 앞에 앉아 이런 저런 생각들을 자판을 두드리며 내 생각을 쏟아내는 거다. 특히 다른 이들의 글을 보며, 영감을 얻고, 내 속에 혼재 되어 있는 감정의 실타래를 뽑아낸다. 오평선 작가는 그걸 굴뚝으로 표현했다. 정신없이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굴뚝이다. 삶의 에너지가 불타면서 나오는 연기를 적절히 배출하고 신선한 공기를 공급해줘야 하는데 굴뚝이 막혀 연기를 들어 마신 채로만 살면 삶이 우울하다. 나에게 또 다른 굴뚝은 와인 마시기이다. 와인은 술 중에 우리의 건강을 가장 덜 헤치는 알코올 음료이다. 우선 맛있고, 매우 다양하여 나의 잠자고 있는 감각을 깨운다. 그 감각으로 내 이성은 더 빛난다. 자동차로 말해, 감각이 엑셀이라면, 이성은 브레이크이다. 늘 브레이크만 밟은 자동차는 잘 나가지 못한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가끔가다 와인을 마시며 내 삶에 엑셀을 밟아주곤 한다. 굴뚝이 막히면 그 연기를 마시는 사람은 결국 나와 내 가족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이다. 또 다른 굴뚝으로 달달한 디저트 한 입, 좋아하는 책과 음악, 와인 한 잔 하며 하는 친구들 과의 수다 등등도 굴뚝이 될 수 있다. 아니면 좋은 글을 읽으며, 인문학적 사유나 명상을 하는 거다. 마음 편히 속을 풀어낼 수 있는 거라면 무엇이든지 좋다. 나만의 굴뚝을 만들어야 행복하다.

② 용서하는 힘을 갖춘다.

용서는 남을 위한 일이지만 사실 우리 자신을 위하는 길이기도 하다. 마음 속에 있는 미움을 걷어내는 순간,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 없다. 미움과 화는 독을 생산하고 이 독은 결국 자기 자신이 먹는다. 감정의 골이 얇든 길든 적당히 신경을 끄고 용서하며 상처 받은 마음을 다독여주는 게 나에게 훨씬 이롭다. 칼 융(Carl Jung)은 인간의 뇌 기능을 넷으로 나눈다. 생각 기능, 감정 기능, 감각 기능, 직관 기능. 생각과 감정은 판단을 해야 하므로 합리적 기능이고, 감각과 직관은 판단을 필요로 하지 않으므로 비합리적 기능이라는 것의 그의 주장이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은 이차적 판단 기능이라면, 감정은 일차적이고 즉각적인 판단 기능이라 할 수 있다. 말이 나왔으니, 생각과 감정을 좀 더 비교해 보자. 생각은 시간이 걸린다면, 감정은 언제나 즉각적인 느낌을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생각은 곧 잊어지는데, 감정은 잘 그렇게 되지 않는다. 우리의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정의 힘이 세다. 그래 감정을 관리할 줄 알아야 한다.

③ 후회는 적당하게 만 한다.

"그때 교사를 그만두지 말 걸...", "그때 프랑스로 유학가지 말 걸..." 등등 나는 후회하는 것들이 많다.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지나간 과거를 가끔 돌아봐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시선을 과거에 빼앗겨서는 안 된다. 물론 깊이 후회한다는 것은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과거에 묻혀 사는 후회가 아니라, 미래의 방향을 잡는 후회를 하여야 한다. 뒤만 쳐다보고 인생을 운전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

④ 마음은 말랑말랑하게, 늘 열어둔다.

나이가 들수록 자기 중심의 좁은 생각에 갇혀 살다 보면 소중한 것들은 점점 멀어진다. 새로운 것을 배울 기회가 사라진다. 내 생각과 달라도 도움이 되는 것은 한 번 해 봐야 한다. 잘 몰라서 그러는데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 줄래? 눈과 귀를 활짝 열고, 마음은 말랑말랑하게 유지하는 게 좋다. 그걸 우리는 '유연함'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2

"용서의 힘"이라는 글을 페이스북 담벼락에서 읽었다. 갈무리하여 공유한다. 잘 알려진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은 ‘인간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용서인가 처벌인 가’ 라는 문제 의식을 담은 작품이다. 소설 주인공 장발장은 빵을 훔친 죄로 19년 감옥살이 하는 내내 세상을 증오한다. 그런데 출소 후 성당에서 은 식기를 훔치다가 들켰을 때 성당 사제가 “내가 준 것”이라며 장발장을 감싸고 은 촛대까지 선물하자 분노를 털어내고 이후 선한 삶을 추구한다.

소설 밖 세상에도 범죄와 비행의 나락에 빠진 이를 처벌 대신 용서로 구원하는 감동적인 스토리가 많다. 서울 용산에서 국숫집을 하던 배혜자 할머니는 생전에 노숙자에게 공짜로 국수를 대접했다. 한 번은 어느 사람이 국수값을 내지 않고 도망가자 뒤따라 나가며 “그냥 가, 뛰지 말고. 넘어지면 다쳐!”라고 외쳤다. 그 외침이 실의에 빠져 있던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남자는 그 후 외국에서 사업가로 살고 있다고 한다.

27년 전 양산 통도사 자장암 시주함에서 3만원을 훔쳤던 가난한 소년이 최근 200만원을 시주함에 넣고 가며 남긴 편지가 신문에 소개되었다. 남자는 그 당시 돈을 또 훔치러 갔다가 스님에게 들켰는데 스님이 말없이 고개만 젓고 어깨를 다독이며 보내줬다고 한다. 스님이 소년을 경찰에 넘겼다면 그는 이후 세상을 원망하며 더 깊은 범죄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자장암 편지 사연은 때론 용서가 처벌보다 힘이 세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실화다.

용서가 곤경에 빠진 이만 구하는 것은 아니다. 용서하는 이에게도 마음의 평화를 준다. 가수 조용필은 ‘큐’에서 ‘너를 용서 않으니 내가 괴로워 안 되겠다’는 가사로 그 차원을 노래했다. 위대한 종교도 용서로 자신을 고통에서 구하라고 가르친다. 어제 <인문 일지>에서 말했던 ‘주님의 기도’에도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는 대목이 있다.

1981년 괴한의 총탄에 쓰러졌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신을 쏜 청년을 찾아가 손을 잡으며 “용서한다”고 했다. 크게 뉘우친 청년은 출소 후 유기동물 구출 활동가로 새 삶을 살고 있다. 용서를 세상을 향한 더 큰 사랑으로 승화 하는 이도 있다. 1987년 아들을 학교폭력으로 잃은 이대봉 참빛그룹 회장은 가해 학생들을 용서한 데 이어 아들 이름으로 장학금을 만들어 40년 가까이 어려운 학생들을 돕고 있다. 그래 오늘 아침은 정호승 시인의 <용서>라는 시를 소환한다.

용서/정호승

달라이 라마

당신에게도 용서할 수 없는 게 있지

용서에도 연습이 필요하다고

내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한 가지 용서하면

신은 나의 잘못을 두 가지나 용서한다고

살면서 얼마나 많이 남을 용서했느냐에 따라

신이 나를 용서한다고

불쌍한 내 귀에 아무리 속삭여도

달라이 라마

당신에게도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슬픔이 있지

용서만이 인간의 최선의 아름다움이 아닐 때가 있지

내가 내 상처의 뒷골목을 휘청거리며 걸어갈 때

내가 내 분노의 산을 헉헉거리며 올라가

기어이 절벽 아래로 뛰어내릴 때

아버지처럼 다정히 내 어깨를 감싸안고

용서하는 일보다 용서를 청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용서할 수 없으면 차라리 잊기라도 하라고

거듭거듭 말씀하셔도

3

'후회는 적당하게 만 한다'고 생각하다, 언젠가 적어 둔 다음 글이 소환되었다. <어느 한 평생(平生)>이란 글이다. SNS에 떠 도는 글인데, 흥미롭다.

동네 앞 시궁창에서 오전에 부화한 하루살이는, 점심 때 사춘기를 지나고, 오후에 짝을 만나, 저녁에 결혼했으며, 자정에 새끼를 쳤고, 새벽이 오자 천천히 해진 날개를 접으며 외쳤다. "춤추며 왔다가 춤추며 가노라!" 미루나무 밑에서 날개를 얻어 7 일을 산 늙은 매미가 말했다. "득음도 있었고 지음이 있었다. 꼬박 이레 동안 노래를 불렀으나 한 번도 나뭇잎들이 박수를 아낀 적은 없었다." 그러나 칠십을 산 노인은 중얼거렸다. "춤출 일 있으면 내일로 미뤄두고, 노래할 일 있으면 모레로 미뤄두고, 모든 좋은 일이 좋은 날이 오면 하겠노라고 미뤘더니 가뿐 숨만 남았구나." 그 즈음 어느 바닷가에선 천 년을 산 거북이가 느릿느릿 천 년 째 걸어가고 있었다. 이 모두가 한 평생(平生)이다.

재미있고 해학적이지만 시사하는 바가 큰 시(詩)다. 하루를 살았건, 천년을 살았건, 한평생이다.

하루살이는 시궁창에서 태어나 하루를 살았지만, 제 몫을 다하고 갔다. 춤추며 왔다가 춤추며 간다고 외쳤다니 그 삶은 즐겁고 행복한 삶이었을 것이다. 매미는 7년을 넘게 땅 속에서 굼벵이로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7일을 살고 가지만 득음도 있었고, 지음도 있었다니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인간은 음을 알고 이해하는데 10년은 걸리고 소리를 얻어 자유자재로 노래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자면 한평생도 부족하다는 데... 매미는 짧은 생(生)에서 다 이루었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사람은 기쁘거나 즐거운 일이 있어도 즐기지 못하고 모두 다음으로 미룬다. "모든 좋은 일은 좋은 날이 오면 하리라"고 미뤘더니 가뿐 숨만 남았다니 이 얼마나 허망하고 황당한 일인가? 무엇이 그리 바쁜지 맹목적으로 허둥대며 살다가 후회만 남기고 가는 게 인생인 가보다. 천 년을 산 거북이는 모든 걸 달관 한 듯 세상에 바쁜 일이 없어 보인다. 느릿느릿 걸어도 제 갈길 다 가고 제 할 일 다하며 건강까지 지키니 천년을 사나 보다. 그러니까 하루를 살던, 천 년을 살던, 모두가 일평생이다.

이 글에서 보면, 하루살이는 하루살이 대로, 매미는 매미대로, 거북이는 거북이 답게, 모두가 후회 없는 삶인데, 유독 인간만이 후회를 남기는 것 같다. 사람이 죽은 뒤 무덤에 가보면, '껄껄껄' 하는 소리가 난다는 우스갯 소리가 있다. 웃는 소리가 아니라, '좀 더 사랑할 껄', '좀 더 즐길 껄', '좀 더 베풀며 살 껄', 이렇게 '껄껄껄' 하면서 후회를 한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한 일인가?

이어지는 글은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네이버에서 '우리마을대학협동조합'를 치시면, 그 곳의 출판부에서 볼 수 있다. 아니면, 나의 블로그 https://pakhanpyo.tistory.com 이나 https://blog.naver.com/pakhan-pyo 또는 https://pakhanpyo.blogspot.com 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