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표 인문일지] 3515.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11월 21일)
1
어제는 <보졸레 누보 2025>가 출시되는 날이었다. 매년 11월 셋 째 주 목요일에 이루어진다. 프랑스 보졸레 지방은 레드 와인 <보졸레>를 생산하며, 11월 셋째 주 목요일 자정을 기해서 <보졸레 누보(Beaujolais Nouveau)> 또는 <보졸레 프리뫼르(Beaujolais Primeur)>의 출하와 동시에 축제가 시작되는 곳으로 유명하다.
<보졸레 누보> 와인은 오래 보관하지 않고 빨리 마셔야 하는데, 발효는 됐지만 숙성이 완전히 되지 않은 술이어서 신선함이 생명이다. 맛은 거칠지만 새 술이라는 의미로 많이 소비된다. 이것은 <보졸레 누보>의 판매 전략의 성공 때문이기도 하다. 여름의 성숙기와 가을의 수확기를 거쳐 겨울 직전에 생산되는 그 해의 햇 포도주인 <보졸레 누보(Beaujolais Nouveau)>는 매년 11월 셋째 주 목요일 날 0시를 기해 전국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판매된다.
<보졸레 누보>에서 보졸레는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끝에 붙어있는 지역 이름이고, '누보(nouveau)는 영어로 'new'라는 뜻이다. 즉 <보졸레 누보>에서 누보는 '새로운'이란 말인데, 나는 <햇 보졸레 지역 와인>이라 말하고 싶다. 이 이름을 따, 한국에서는 <막걸리 누보>도 있다. 햇 쌀로 빚은 막걸리란 뜻이다. 보통의 와인은 아무리 빨리 출시가 되어도 다음 해에 시장에 출시되지만, 햇 와인은 당해 년도에 수확한 포도를 가지고 와인을 만들어 그 해에 출시하는 와인이다. 여러 와인산지에서 다양한 햇 와인들이 생산되지만 역시 전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프랑스 보졸레 지방의 햇 와인인 <보졸레 누보>이다.
<보졸레 누보>는 9월에 포도를 수확하여 4-6주가량 '탄산침용 공법'을 이용해 빠른 숙성을 시킨 후 매월 11월 셋 째주 목요일에 출시된다. 이 와인은 탄닌이 적고 바디가 가벼워서 오랫동안 두고 숙성 시킬 수 없다. 우리가 흔히 마시는 와인이 '김장 김치'라면, <보졸레 누보>는 와인의 '겉절이'인 셈이다. 김장 김치는 숙성될 수록 그 진가를 드러낸다. 그러나 겉절이는 겉절이대로 풋풋하고 신선한 그 나름대로의 맛이 있다. 수육에 길게 찢은 겉절이에 굴을 넣어 먹는 그 맛은 잊을 수가 없다. 그런 마음으로 어제 <보졸레 누보 2025>를 마셨다. 이 와인의 포도 품종은 가메이(Gamay)이다. 그래 이름이 비스한 포항 과메이를 택배로 받아 안주로 마셨다.
과학 기술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일상생활의 모든 부분에서 과학의 도움을 받아 살지만 정작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그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첨단에서 살아가는 이들일수록 직접적 감각 체험으로 부터 멀어진 채 살아간다. 몸을 사용하고, 몸의 감각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햇 와인' <보졸레 누보 2025>을 아직 마셔보지 않은 분들은 한 번 즐겨 보시기 바란다.
2
"내 인생을 펼치려면 계속해서 부딪혀야 한다"가 오늘의 화두이다. <계사전> 제11장에서 나오는 "시초(점을 치는 데 사용되는 도구)의 덕은 원을 이루어 신묘하고, 괘의 덕은 모남이 있어 할 일을 아는 것이다(蓍之德 圓而神 卦之德 方以知, 시지덕 원이신 괘이덕 방이지)"라는 말을 공유한다.
위의 그림은 세상 만물을 표상하는 64괘의 모습이다. "시초의 덕은 원을 이루어 신묘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늘의 뜻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신비를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간절한 염원이 있는 사람은 그 염원이 잘못 흘러 가득 찬 것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걸 이루지 못하면 내 인생은 의미가 없다"는 태도는 매우 위험하다는 거다. 비로 간절히 바라는 그 염원 하나로 가득 찬 것이다. 이는 간절히 바라는 것이 아니라, 집착으로 가득 찬 것이다. <<역경>>은 집착하고 있는 것은 온 우주가 미워하고 방해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찌 해야 하는가? <<역경>>은 "낙천"하라고 한다. 지금 벌어지는 일에는 나의 이해를 넘어선 하늘의 뜻이 있을 것이니, 이러한 하늘의 뜻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러니 나를 비워야 한다. 끊임없이 나를 비우면 이제 온 우주가 그것을 채워준다. 어제 <지산 겸> 괘의 <단전>을 말했던 것처럼, 하늘과 땅과 사람이 모두 겸허한 것(비어 있는 것)을 좋아해서 유익을 주며, 귀신까지도 복을 준다고 했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비우고 끊임없이 채워질 것이라 믿는 것이 "낙천"의 기술이다.
위의 그림처럼,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부여된 하나의 괘(나에게 새겨진 결, 기질)에서 출발하여 이 세상 여행을 나서게 된다. 그 길에서 사람은 다른 괘라는 '연(緣)'을 만나게 된다. 흔히 '인연(因緣)'이라 말하는데 '연'이 맞는 표현이다. 여기서 다른 괘는 사람이자 그를 '연'으로 해서 펼쳐지는 사건이 된다.
사람이 인생 길을 가는 동안 다른 괘를 만난다는 것은 신비한 수수께끼와 마주치는 것이다. 스핑크스는 자기 앞을 지나가려는 사람에게 수수께끼를 던진다. 이 질문에 보다 우월한 지혜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보다 우월한 지혜로 수수께끼를 푸는 데 성공했을 때 사람은 해당 괘로 상징되는 새로운 '도'를 터득한 것이다. 이때 사람은 그동안 자신을 가두어 온 눈에 보이지 않는 한계를 넘어서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보다 높은 존재 질서를 허가 받아 살게 된다. '도를 깨친다는 것', '도통 했다'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3
시를 한 편 공유한다. 인문학의 본질은 ‘인간에 대한 이해’ 이다. 그러나 그 이해는 언제나 정의나 논리로 완성되지 않는다. 철학이 인간을 ‘설명’하려 한다면, 시는 인간을 ‘느끼게’ 한다. 시를 읽는 순간, 우리는 인간의 언어가 얼마나 깊고 따뜻한 지를 깨닫는다.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을 읽는 일이다. 시의 한 행은 거울처럼 내면을 비추고, 잊고 지낸 감정의 결을 되살린다. 우리는 시 속에서 타인의 언어로 나를 만나고, 그 만남 속에서 다시 세계를 이해한다. 시의 여백은 철학의 질문처럼 우리에게 사유의 시간을 주고,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문을 연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단순한 독서가 아니라, 사유의 시간이며 존재의 여행이다. 시의 언어는 우리를 조용히 붙들고, 일상의 속도에 지친 마음을 다독인다. 그 한 줄의 시가 마음속 어딘가를 울릴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 다움’이 무엇인지를 다시 느낀다.
길 위의 거울/고찬규
길을 걷다가
길인 줄도 모르다가
걷고 있는 줄도 모르다가
헐떡이며 쉬다가
쉬다가 나는 저만치 있는
나를 보아버렸다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길을 벗어난 자 감옥에 갇히고
감옥을 벗어난 자 길에 갇힌다
기도해보지 않은 자 있는가
바람의 채찍에 생채기
나지 않은 자
또 어디 있는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무슨 급한 볼일이 있는 것일까? 주변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헐레벌떡 길을 걷고 있는 시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풍경을 완상하기는커녕 걷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다. 서둘러 걷다 보니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길 위에 선 목적을 내려놓고 잠시 다리 쉼을 하던 시인의 눈에 “저만치” 거울이 들어온다. 자신과 마주친다. 저만치는 시인과 거울의 거리지만, ‘거울 속의 나’를 통해 확인한 삶의 괴리이기도 하다. 먹고살기 위해 헐떡이는 사이에 정작 내가 원하는 삶은 잊혔기 때문이다. 시인은 거울 밖에서 거울 속의 나를 응시하다가 문득 ‘감옥’을 떠올린다. 삶이 감옥에 갇힌 건 아닌지 생각한다. 거울은 반성의 사물이고, 길은 치열한 생존경쟁이 벌어지는 곳이다. 그런 길에서 벗어나는 것은 “감옥에 갇히”는 것이고, “감옥을 벗어”나 찾은 자유도 결국 생존의 길 위에서 바둥거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삶이 힘들 때마다 간절히 기도도 해보고, “바람의 채찍”에 상처를 입기도 한다. 하긴 상처 없는 삶이 어디 있겠는가? 길 위의 사유가 깊다. 김정수 시인의 '멋진' 덧붙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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