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산 시담(詩談)] 사라진 동네

박미산 승인 2024.04.13 19:36 의견 0
박미산 시인, 작가 [사진=더코리아저널]


[박미산 시담(詩談)] 사라진 동네 / 박미산

그를 버린 순간

나와 함께 성장했던 고향은

나의 발치에서 사라졌다

날아오거나 날아가거나

그건 그의 사정이다

그를 버린 건 배신행위가 아니다

기억은 무자비해서

어떤 사람의 영혼도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귀에 익지 않은

눈에 익지 않은 곳에서 나를 길들였다

지금까지 나를 붙잡은 건

필사적으로 버티던 집 한 채였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남은 집 한 채

덩그렇게 솟은 채로

비가 퍼부어도

눈이 쏟아져도 포기하지 않았다

진흙으로 무장한 그 집을 에워싸고 건물이 쑥쑥 자라났다

강제 철거보다 더 질긴 것은 기억이다

칠흑 같은 밤보다 더 암흑인 옛날의 그를 일부러 버렸는데

사라진 동네를,

포기하지 않던 그 집을,

짊어지고 그가 날아왔다

억수같이 비가 퍼붓던 날,

집 주위의 진흙이 흘러내리던 아슬아슬한 순간이

지금 이 순간 날아가거나

혹은 날아오거나

-『태양의 혀』(채문사, 90쪽)

......

나는 고향 인천을 싫어했다.

고생한 기억만이 남아있는 그곳.

그곳 기억을 잊으려고 애써서인지 인천 생각이 전혀 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런데 잊은 게 아니었다.

애써 기억을 지운 것뿐이다.

내가 대학원 다닐 때 고향 친구가 학교로 찾아왔다.

그 친구는 국문과를 졸업한 후 시인이 되었다.

그 친구와 옛날이야기를 하다 보니 우리가 살던 도화동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선인재단은 당시 우리가 살던 도화동을 흡수해서 1970년도에 선인체육관을 착공했다.

백인엽, 백선엽 형제의 첫 이름을 딴 선인재단은 무자비했다.

백인엽 이사장은 헐값으로 도화동 일대 허름한 집들을 강제 매입해서

동양 최대의 체육관을 지으려고 몇 년 동안 집들을 사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도 모래마을 땅을 불하받고 약간의 이주 비용을 받아

인천시 구월동 모래마을로 이사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동네에서 유일하게 한 집이 팔지 않고 버텼다.

재단 측은 그 집만 남겨 놓고 불도저로 주위를 다 밀어버렸다.

덩그러니 남은 그 집은 결국 두 손을 들 수밖에.

국민학교 학생일 때 필사적으로 버티던 그 집 한 채의 기억이 평생 나를 이끌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저 집처럼 무너지지 말자고,

끝까지 버텨보자고,

*** 작가 소개

박미산

시인.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현대시 전공. 문학박사.

백석, 흰 당나귀 운영.

1993년 <문학과 의식>수필 등단

2006년 <유심> 시 등단

200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등단

시집 『루낭의 지도』, 『태양의 혀』, 『흰 당나귀를 만나 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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