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인 식스센스] 서기 97년 8월, 폼페이에서는... <폼페이 유물전>을 보고.

이희인 승인 2024.04.09 19:11 의견 0
이희인 작가, 카피라이터 [사진=더코리아저널]


[이희인 식스센스] 서기 97년 8월, 폼페이에서는... <폼페이 유물전>을 보고.

서기 97년 8월 24일. 갑자기 분출한 베수비오산의 화산 활동으로 순식간에 지상에서 사라진 도시 폼페이. 오랫동안 전설로만 떠돌던 사라진 도시 부근에서 첫 유물이 발견되며 유적 발굴이 시작된 것이 16세기 무렵부터라 한다.

18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발굴이 이루어져 웅장했던 도시의 흔적과 호화로웠던 폼페이 사람들의 삶이 어느 정도 밝혀졌다. 폼페이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대부분 남부 이탈리아의 나폴리 국립고고학박물관에 소장돼 있는데, 최근 그 유물 일부가 한국에 와 전시가 열리고 있다. <폼페이 유물전 – 그대, 그곳에 있었다> 전이 그것.

[사진=이희인]


그리스 문명의 적자로 팍스 로마나를 건설한 로마 남부 지역의 한 도시가 얼마나 호화롭고 풍요로운 문화와 삶을 누렸는지 짐작하고도 남는 전시다. 도굴꾼들에 의해 훼손된 다른 왕가의 무덤과 달리, 20세기 초까지 모래 속에 파묻혀 있어 이집트 왕조의 가장 훌륭한 증언자가 된 투탕카멘 왕의 피라미드처럼, 5미터 이상의 화산재가 뒤덮여 당시의 유적과 유물이 고스란히 발굴된 폼페이 역시 고고학계로서는 축복이라 아니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18세기 성행했던 그랜드투어 최고의 여행기로 꼽히는 『이탈리아 기행』에서, 저자 괴테는 이 폐허만 남은 도시를 만나게 된 흥분과 놀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재앙이 있었지만, 이토록 후세에 즐거움을 가져다준 재앙은 드물 것이다. 나는 이보다 더 흥미로운 걸 본 적이 없다.”(요한 볼프강 폰 괴테, 『이탈리아 기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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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시에서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점은 크게 2가지였다. 하나는 회화의 역사에서 유화는 물론 템페라화보다 앞선 기법으로, 세계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발달한 ‘프레스코화’가 이미 폼페이 부흥기에 상당한 수준에 와 있었다는 사실. 중세 시대 널리 유행한 모자이크화 이전에도 프레스코화가 이토록 지배적이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다른 하나는 이 도시가 숭배했던 신, 이 도시 문화의 저변을 이룬 신, 혹은 신화가 ‘디오니소스’였다는 점이다. 전시장 곳곳에 배치된 디오니소스의 조각, 회화를 비롯해 폼페이를 수놓은 많은 장식 중에는 실레누스, 사티로스 같은 디오니소스 계열의 괴수, 신들이 즐비했다.

이들 신과 괴수의 이름은 프리드리히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기원전 5세기 이전 그리스 비극의 기원이 된 디오니소스 축제며 사티로스극, 뒤티람보스 등을 언급하며 자주 소환했던 이름이자 상징들이었다. ‘아폴론적’이라 할 만한 예술품이나 취향은 찾아볼 수 없었던 전시물 속에서, ‘디오니소스적’인 취향으로 일구어낸 도시 문화가 만연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도취와 황홀경, 술과 춤에 빠진 디오니소스적 문화를 퇴폐로 규정함으로써, 이것을 폼페이 멸망의 원인으로 해석할 사람도 없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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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의 의식주며 여가, 예술, 사회 활동 등을 차례로 보여주던 동선이 마지막 방에 이르러 전시는 관람객으로 하여금 숭고한 감정을 부추긴다. 실제 폼페이에서 발굴된 사람 형상의 빈 홀에 석고를 부어 떠낸 ‘폼페이인’의 조형물과 함께 최후의 날을 재현한 영상이 벽면을 가득 채우며 삶의 유한성과 의미를 곱씹게 만든다. 땅이 흔들리고 화산이 분출하며 화산재가 튀어 오르고, 거대한 화산재에 차곡차곡 쌓이며 순식간에 파묻힌 폼페이의 화려했던 문화와 거기 살던 사람들. 관람객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전시장을 황황히 빠져나와야 했다.

근래 많은 재난 영화, 아포칼립스 영화, SF 영화들이 보여주듯, 인류를 순식간에 멸망시킬 위험 요소들은 오늘날 우리 곁에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다. 더 이상 이런 위협들이 픽션으로만 치부되지 않는다. ‘세상은 인간 없이 시작되었고, 인간 없이 끝날 것이다’던 누군가의 말처럼 인간은 이 지구별과 광활한 우주 안에서 매우 작고 하찮은 존재이자 우연한 존재에 불과할 것이다. 오늘 이 시간에 더 충실할 것, 그리고 대자연 앞에 늘 겸손할 것. 서기 97년 8월 어느 날 사라져간 폼페이 사람들이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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