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석 컬쳐인사이트] 조선 달항아리 회수 프로젝트

이홍석 승인 2024.04.08 12:45 | 최종 수정 2024.04.08 12:47 의견 0
이홍석 문화평론가, 작가 [사진=더코리아저널]


[이홍석 컬쳐인사이트] 조선 달항아리 회수 프로젝트

Ⅰ. The Great White Porcelain Jar(白磁大壺)

14세기 예술적 자유로움의 극치를 보여준 분청사기와 겸손과 비움의 미학으로 승화된 순백의 백자를 발전시킨 조선의 자기(磁器, porcelain)는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에 걸쳐 ‘백자대호(白磁大壺)’로 불리는 위대한 예술품을 빚어낸다. 조선 후기, 숙종(1661~1720)에서 영조(1724~1776) 시대에 걸쳐 불과 1세기라는 짧은 시기에만 조선왕조 유일의 관요(官窯)인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에서 백자대호가 제작되었는데 현재의 경기도 광주 일대(금사리)가 그 가마터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380명으로 구성된 분원(分院)의 장인들이 있었으며, 조선의 수준 높은 백자를 생산하던 340여 개소의 가마터가 운영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백자대호는 백항(白缸), 백대항(白大缸)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18세기 전반부 50년에 걸쳐 왕성하게 제작되었는데, 왕실이나 사대부가 아니면 사용할 수 없는 그 당시에도 매우 귀한 항아리였다.

백자대호는 보통의 도자기보다 크고 무거워서 몸체를 중심으로 윗부분과 아랫부분으로 나누어 성형하고, 이를 맞붙여 소성(燒成)하기 때문에 항아리 중심부에는 고유한 접합 흔적이 남게 된다. 이렇게 남겨진 흔적은 백자대호의 제작 시기나 독특한 외관을 결정짓는 중요한 특징이 되어 역사적 가치와 예술적 깊이를 더한다.

보통의 항아리는 바닥이 넓고 입구가 바닥보다 작아서 안정적인 형태로 제작된다. 그러나 백자대호는 이들과 달리 반대로 역설계되어 있다. 입구의 지름이 항아리 바닥 굽의 지름보다 넓어서 불안정한 형태인데, 이를 멀리서 보면 마치 항아리가 공중에 ‘붕’ 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한국은 물론 세계 도자기 역사에 있어서 이런 독창적 형태의 항아리는 오로지 조선왕조에서만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진 형태다.

Recovering The Plunder No.1(Moon Jar, 18C, The British Museum), Hongseok LEE

Ⅱ. The Great Moon Jar(달항아리)

백자대호의 바닥과 입구의 이런 역설계가 낳은 불안정이 결과적으로는 세계적 예술품의 반열에 조선의 백자 항아리를 주목받을 수 있도록 만든 주요한 지점이다. 또한, 시대적으로 이를 놓치지 않은 김환기 작가가 있었다. 20세기 세계 미술의 거장에 오른 김환기(1913~1974)는 백자 항아리를 유별히 사랑하던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50년대 다수의 추상화에 조선의 백자 항아리를 함께 그려 넣었고, 동시에 골동품 가게에서 항아리 수집가로도 유명했다. 백자 항아리를 아기처럼 소중하게 품에 끌어안고 작업실까지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에게 직접 백자 항아리를 팔았던 골동품상들의 이야기다.

“단순한 원형이, 단순한 순백이, 그렇게 복잡하고, 그렇게 미묘하고 불가사의한 미를 발산할 수가 없다. 싸늘한 사기지만 살결에는 따사로운 온도가 있다.” - 김환기

김환기는 백자 항아리를 ‘달항아리’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김환기 작가의 절친한 친구로 알려진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미술사학자 최순우(1916~1984)와 서로 백자대호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1960년대 이런 애칭을 붙였다는 것이 학계 정설로 여겨진다.

Recovering The Plunder No. 2(Moon Jar, 18C, The Cleveland Museum Of Art), Hongseok LEE

이후, 2000년 런던 영국박물관은 한국과 협업으로 한국실을 개관하면서 18세기 백자대호를 ‘Moon Jar’라는 이름으로 서구에 소개한다. 당시 엘리자베스 2세 여왕(Elizabeth II, 1926~2022)은 달항아리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릇이라 칭송하였을 뿐만 아니라, 왕실 귀족의 일원이었던 사진작가 스노든(Antony Charles Robert Armstrong-Jones, 1st Earl of Snowdon) 백작은 그의 사진 작품에 달항아리를 등장시키기도 했다. 보그, 선데이 타임스 매거진, 선데이 텔레그래프 매거진 등에 출판되었고, 그의 사진 280여 점은 국립 초상화 갤러리의 영구 소장품이다.

이보다 앞서 1935년, 일제강점기 한반도를 방문한 영국 현대 도예가인 버나드 리치(Bernard Leach, 1887~1979)는 달항아리 몇 점을 사들여 영국으로 떠나며 “나는 행복을 안고 간다”라며 소감을 남겼는데, 버나드 리치의 달항아리 사랑도 유별나다. 그는 일본에서 도예를 시작했지만, 리치의 만년기 작품이 지닌 조형적 특성엔 한국의 고전적 도자기의 형태와 제작술에 영향을 받았음이 드러난다.

1st Earl of Snowdon (photographer), Lucie Rie in her London studio with Korean Moon Jar, 1989


스노든 백작이 1989년에 촬영해서 남긴 이 한 장의 사진엔 백자 달항아리의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사진의 주인공은 ‘Lucie Rie’는 당시 남자 도예가들만 있던 서구 사회에서 보기 드문 여성 도예가였으며, 그녀의 친구였던 버나드 리치가 1935년 서울에서 사들여 가져간 달항아리를 1943년 그녀에게 선물한 것이다.

루시는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 조선의 달항아리를 그녀의 스튜디오에 소장하였고, 1995년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사진의 달항아리는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으로 옮겨졌다.

2005년 한국엔 ‘우악문화재단’이 소장한 국보 한 점과 ‘호암미술관’이 소장한 보물 한 점, 단 두 점의 백자대호만 문화유산의 명맥을 잇는 상태였다. 이에 문화재청은 국립중앙박물관을 포함해 전국에 20여 점으로 파악된 조선의 달항아리를 한자리에 모아 국가 지정 문화재 신청을 받기로 한다.

이후, 2011년 문화재청은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백자대호 일곱 점의 공식 명칭을 모두 ‘백자 달항아리’로 변경했다. 이로써 문화재로도 예술품으로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며 고려의 청자(靑磁)에 비해 주목받지 못하던 달항아리는 국내는 물론 세계적 사랑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 1969~)은 2013년 그의 책 <치유로서의 미술>에서 영국박물관에 전시된 달항아리를 보고 “달항아리는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만족할 뿐이다.”라며 감상을 전했다. 프랑스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Guy Sorman, 1944~)은 “백자 달항아리는 어떤 문명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한국만의 미적·기술적 결정체”라고 말하기도 했다.

백자 달항아리의 쓰임새는 현재까지도 정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술을 담았다거나 오동나무 기름을 담았다거나 또는 젓갈을 담았을 것이라는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할 뿐이다. 아마도 불안정한 달항아리의 형태를 미루어 짐작한다면 특별한 쓰임보다는 당대의 사회와 문화가 내포하고 있던 어떤 상징적 표현의 수단은 아니었을까.

2005년 전국에 숨어있던 달항아리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 위해 그해 광복절인 15일에 개관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달항아리’ 전시회에는 아주 특별한 사연이 있다.

Recovering The Plunder No. 3(Moon Jar, 18C, Asian Art Museum of San Francisco), Hongseok LEE

Ⅲ. Shiga’s Moon Jar in Nara(시가의 항아리)

국립고궁박물관의 달항아리 전시에는 모두 아홉 점이 출품되었는데, 이미 문화재로 등록된 2점과 등록 예정인 5점을 합친 일곱 점은 국내에서 출품되었고, 나머지 두 점은 각각 앞서 언급한 영국박물관의 소장품과 오사카 시립 동양도자미술관의 소장품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오사카에서 온 달항아리이다. 이 달항아리를 가리켜 ‘시가의 항아리’라고 부르는데 거기엔 매우 특별한 이유가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서 ‘소설의 신’이라 찬사받는 시가 나오야(志賀直哉 Shiga Naoya, 1883~1971)라는 문학가가 있었다. 종전 직후, 병세로 그가 한때 몸을 의탁했던 나라시(奈良市) 소재의 사찰인 도다이지(東大寺) 산하 관음원(觀音院)이 있었는데, 그 사찰의 주지 가미쓰카사 가이운(上司海雲)의 헌신에 시가는 도쿄로 돌아간 후 감사의 표시로 조선의 백자 달항아리를 그에게 선물로 보냈다.

Recovering The Plunder No. 6(Moon Jar, 18C,THE MUSEUM OF ORIENTAL CERAMICS, OSAKA), Hongseok LEE

덕분에 주지승은 항아리 법사로 불리고 달항아리는 ‘시가의 항아리’라는 별칭이 붙여졌다. 그리고 평화로운 시기가 지나갔다. 어느새 이들 두 주인공은 조선의 백자 달항아리를 사찰에 남겨두고 역사의 뒤로 떠났다. 그러던 1995년 7월 4일 이 작은 사찰 관음원에 도둑이 들었다. 도둑은 달항아리를 훔쳐서 달아나다 당시의 주지에게 현장에서 발각되었고, 경비원을 부르자 백자 달항아리를 바닥에 내동댕이쳐서 산산조각을 내고 달아났다.

조선에서 수탈당했을 달항아리는 일본의 어느 작은 절에까지 흘러 들어가 고작 도둑의 욕심과 손에 다시 산산조각이 나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했다. 이 사건을 알게 된 오사카의 동양도자미술관은 관음원의 주지를 설득해 3백 조각 이상으로 부서진 조각들과 가루를 모아 2년 6개월여의 노력 끝에 달항아리를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조선을 떠나 도쿄로, 도쿄에서 다시 나라현의 작은 사찰로 긴 여행을 떠났던 백자 달항아리 한 점은 온몸이 산산이 부서졌다가 다시 봉합되어 한국 땅을 밟게 되었다. 2005년 8월 15일, 국립고궁박물관 달항아리 전시회에 영국으로 넘어갔던 달항아리와 함께 ‘시가의 항아리’는 잠시 친정인 모국을 방문한 것이다. 잔혹한 전쟁보다는 달항아리를 사랑했던 시가 나오야가 살아있었다면 상처받은 달항아리를 어쩌면 한국의 품으로 영원히 돌려보내지 않았을까?

이로써 일본의 미술품 복원 능력은 세계적 수준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고, 아이러니하게도 ‘시가의 항아리’는 본격적으로 달항아리라는 존재를 세계에 알리게 된다. 한국 전시보다 앞서 복원된 시가 나오야의 달항아리를 2000년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전시함으로써 전문가들 사이에서 달항아리는 극찬을 받는다. 그리고 달항아리는 점당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Ⅳ. RECLAIMING LOOTED CULTURAL HERITAGE(약탈 문화재 회수)

작업자는 여기서 생각하게 된다. 물질과 정신의 현실적 존재(actual entities) 또는 현실적 계기(actual occasions)를 포섭할 수 있는 작업의 영역에 대해서 고민하게 된다. 달항아리라는 물질적 개체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빼앗겼다. 그러나 침략자들이 이 땅에서 달항아리를 만들었던 우리의 정신까지 수렴하여 가져간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애초에 수렴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백자 달항아리는 예(禮)와 인(仁)을 실천으로 하는 성리학을 기반으로 둔 조선왕조 이념의 아이콘이다. 달항아리는 어질게 둥글고 또한 겸허하게 좁은 굽으로 서 있다. 화려하지 않은 유백색의 빛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시선을 편안하게 하여 예를 다한다. 절제하자 단순하며 겸손하여지자 만족하게 된다. 크지만 뽐내지 않고 일그러졌지만 아무나 만들 수 없다.

달항아리는 마치 13일쯤의 달, 또는 17일쯤의 달처럼 완전하게 차지도 기울지도 않은 채, 끝내 바라보게 만드는 전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순백의 항아리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서 모든 것을 채울 수 있는 그릇이다.

나는 세계 곳곳으로 빼앗긴 달항아리, 이 땅의 문화유산을 되찾아 오고자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시가의 항아리’가 겪은 고난과 웃고 바라보기만 할 수 없는 그의 명성을 보며 그의 자리를 확인하고 싶었다. 물질은 생동하는가? 그렇다. 그러나 물질의 생동은 정신의 생동에 연결되고 해석된다. 물론 우주는 불친절해서 애초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실존주의자들이 반박한다면 그것 또한 맞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저 태양이 눈 부셨고 뫼르소(Meursault)에겐 권총 한 자루가 있었을 뿐이라 말한다면 이런 노력이 허사가 되겠지만.

Recovering The Plunder No. 4(Moon Jar, 18C, Museum Of Fine Arts, Boston), Hongseok LEE


그러나 물질과 정신은 현실적 존재에 함께 포섭되어 있다. 물질은 과거의 산물이며 정신은 새로움을 낳는 개념적 능력이다. 약탈은 물질에 국한되어 있으나 정신은 개념의 영역이자 능력이며 미래에서 현재를 멸(滅)하여 새롭게 하는 현실적 계기(actual occasions)가 된다. 물질에 기반한 약탈은 소멸하여야 하고 달항아리가 갖는 객체의 불멸성(objective immortality)은 드러나야 한다.

현재 국내에는 고작 20여 점 남짓 조선의 백자 달항아리가 남아있을 뿐이다. 나는 이 연구와 조사를 시작하며 세계 온갖 미술관이나 개인들이 소장하고 있는 달항아리를 발견하게 된다. 특히 일본의 교토에는 상당수의 조선백자 달항아리가 직접 유통되고 있거나 대리인을 통해 미국 등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정황들을 찾아냈다. 안타까운 일이다. 18세기 흠집 하나 없는 달항아리가 고작 1~3만 달러에 거래되기도 한다.

나는 이들이 비밀스럽게 또는 자랑삼아 올려놓은 달항아리 자료와 사진을 가져와 오랜 시간 작업했던 나의 ‘Hyper Collage Photography’에 AI를 결합하여 새로운 생성을 시도하고 있다. 예술의 기능에선 이른(early) 시도이고 과정(process)은 진지하며 실재(reality)는 달항아리가 이 시대에 현상(develop)되기를 바란다. 만일 어떤 미술관이라도 달항아리와 그것을 찍은 사진이 자신들의 것인데 도용했다 시시비비를 건다면 더욱 반갑겠다.

도둑에게 다시 훔치는 것이 무슨 죄가 되겠냐 이런 일차원적 대응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약탈 문화유산 회수> 프로젝트를 위해 일일이 그 약탈자들을 찾아다니고 통 사정하며 어렵게 촬영해서 작업을 진행할 의향이 전혀 없다. 이것은 생동하는 세계와 현실적 존재(actual entities)가 이루어 내는 넥서스(nexus)에서 새로운 레퍼런스(reference)일 뿐이다. 프로젝트의 결과 또한 과거로부터 현재에 맺힌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멸(滅)을 이끌고 갈 미래의 정신에 있다. 그것이 달항아리가 진정으로 우리에게 회수되는 방식이다. 그런 정신이 지금 한국에서 조선백자의 전통을 잇고 있는 도예가들에게 힘이 되었으면 싶다. 사람들에게 예술이 보는 재미, 듣는 재미, 유익한 삶이 되었으면 싶다. 시가의 항아리가 정말로 한국인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으면 싶다.

글 · 사진 이홍석,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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