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산의 시담(詩談)] 진가의 돌멩이

박미산 승인 2024.03.02 11:18 의견 0
박미산 시인, 작가 [사진=더코리아저널]


[박미산의 시담(詩談)] 진가의 돌멩이

남자는 늘 같은 행동을 반복했지

때에 절은 창푸파오*를 입고 돌멩이를 날렸어

남자가 던진 돌멩이는 해가 갈수록 까맣게 익었어

눈이 와도 열매가 매달리던 포도밭

시도 때도 없이 잘 익은 열매가 인천교까지 휭휭 떨어졌어

달빛을 삼킨 열매를 씨도 뱉지 않고 먹었어, 우리는

새까맣게 타버린 혓바닥을 서로 보며

소리 내지 않았어, 킬킬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길 때마다

우리들의 뱃가죽이 봉긋 솟아나고

달은 과수원에만 맴돌고 있는데

뜯어낸 철망 사이로 누군가 한 점으로 서 있었어

가! 가! 소리를 귓등으로 흘려버리고, 우리는

쌍절곤을 휘두르는 흉내를 내며

헐렁한 셔츠 가득 포도를 따서 담았어

광속으로 날아온 돌멩이가

포도밭에 엎드려 있던 우리 옆구리 사이로

머리위로 아슬아슬하게 날아왔어

딱딱한 포도 알을 밟으며

우리는 달리고

어느새 고수가 되어버린 진가의 돌멩이는 날고

-『루낭의 지도』(채문사, 38쪽)

* 창푸파오; 중국의 평상복.

인천시 남구 도화동 해방촌은 당근밭뿐만이 아니라 포도밭도 있었다.

포도밭 역시 화교가 주인이었다.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이라 해방촌 아이들은 늘 배가 고팠다.

우리는 한밤중에 포도 서리를 자주했다.

이 고랑 저 고랑을 훑으며 씻지도 않은 포도를 정신없이 먹어댔다.

포도로 배를 채우고 나서 남자애들은 구멍 난 러닝셔츠에 포도를 담고

여자애들은 치마폭에 포도를 가득 담고 달빛 아래에서 킬킬거리며 앉아 있곤 했다.

상당히 먼 거리에 있던 주인 진가는 막대기로 돌멩이를 치면서 우리를 위협했다.

그 돌멩이는 우리의 머리 위, 옆구리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우리는 밤중에 또 포도 서리를 하고 진 씨 아저씨는 서리하는 우리에게 돌멩이를 날리는 일을 반복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진 씨 아저씨는 무술의 최고 고수였다고 한다.

반질반질한 창푸파오를 입은 진 씨 아저씨는 돌멩이로 우리들을 맞힐 수도 있었지만,

위협만 했던 것이었다.

철조망 친 개구멍을 드나들며 서리를 한 우리들을 포도로나마 배불리 먹게 한

진 씨 아저씨는 우리를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갔다.

지금은 서리를 하면 주인이 바로 신고하지만, 모두가 어렵게 살던 그 시절은 인정이 있었다.

*** 필자 소개

박미산

시인.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현대시 전공. 문학박사. 백석, 흰 당나귀 운영.

2006년 <유심> 시 등단

200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등단

시집 『루낭의 지도』, 『태양의 혀』, 『흰 당나귀를 만나 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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